고종 황제는 덕혜옹주가 어린 시절부터 그의 눈에서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딸의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덕혜옹주가 5세가 되었을 때, 덕수궁 내에 준명당이라는 장소에 처음으로 왕실 유치원을 설립했다. 이곳은 덕혜옹주뿐만 아니라, 지체가 높은 귀족의 자녀들이 함께 모여 근대화된 교육을 받는 장소였다.
고종 황제의 관심은 덕혜옹주의 교육 뿐만 아니라 그녀의 생활 전반에 걸쳐 있었다. 고종 황제와 덕혜옹주의 거처는 함녕전이었고, 준명당까지의 거리는 150미터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 황제는 아이의 편의를 위해 스스로 타지 않던 가마를 덕혜옹주를 위해 준비했다.
덕혜옹주는 그의 아버지 고종 황제로부터 깊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았고, 그의 어린 시절은 노래와 춤을 사랑하는 밝고 활발한 소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딸을 향한 고종 황제의 뜨거운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는 딸을 호적에 등록시키는 것조차 자신의 의지로는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시 조선은 일제 강점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고종 황제는 일제의 감독 아래에 모든 권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덕혜옹주의 어머니인 양귀비의 신분을 이유로 그녀의 호적 등록을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고종 황제는 딸이 일제에게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조선 총독 데라우치에게 직접 호소하는 고종 황제의 눈빛은 깊은 애정과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이 아이는 내 노후의 유일한 위안이다"라며 데라우치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덕혜옹주를 직접 만나 본 데라우치는 그녀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 앞에서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덕혜옹주는 왕실족보에 그의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이전에는 복녕당의 아기씨로 불리우던 이름 없는 존재에서, 6살에 왕실의 정식 후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지배 하에서 조선의 왕실은 매우 제한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의 왕실을 약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사용했으며, 그 중 하나로 왕실의 후손들을 일본 천황 가문과 결혼시켜 완전히 흡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덕혜옹주는 그녀의 피와 기운이 조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요 인물로 간주되었다.
고종 황제는 딸 덕혜옹주가 일본 천황 가문과의 혼인을 강요받을 가능성을 깊이 우려했다. 그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조선 내에서 덕혜옹주의 결혼을 조기에 결정하려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덕혜옹주의 약혼을 그의 신뢰하는 비서인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성사시키려 했다. 이러한 계획은 덕혜옹주와 조선의 미래를 위한 고종 황제의 심혈을 기울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일제에 의해 발각되었다. 일제는 그들의 전략을 방해받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김황진의 궁중 입장을 금지시켰다. 결국 덕혜옹주와 김장한과의 혼약은 무산되었고, 고종 황제는 다시 한번 일제의 압박 속에서 그의 권력의 한계를 느꼈다. 그의 마음은 딸을 지키지 못하는 무력감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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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어린시절 특별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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